새벽 6시경, 밤이 낮보다 화려한 도시 방콕에서 인도행 비행기가 떴다. 나는 이미 비몽사몽의 상태였다. 마지막 밤이 내게 남겨준 알콜과 졸음이 내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바로 잠이 들었고 깼을 때쯤 비행기에서는 이미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 타이항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컵쿤캅" 승객들이 나갈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자자는 생각에 자리에 눌러앉아있다가 내쫓기듯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리 비자를 받아온 덕분에 입국수속은 수월했다. 숙소가 몰려있을 빠하르간지까지 가는 가장 싼 루트는 역시 철도. 공항철도에 올라탔는데 왠걸, 인도스럽지 않게 시설이 너무 깔끔한 게 아닌가. 내 상상 속의 인도는 카레 냄새가 땅속까지 배어있는 곳이었는데.
공항철도에 올라탄 뒤 기둥에 자물쇠로 가방을 단단히 묶었다. 이렇게 안 하면 털리기 쉽다고 들었었다. 객차 안에 있는 인도인들이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수백만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 파도의 서막이었다.
'쟤는 어디서 온 걸까?', '아마 중국일거야', '니하오라고 해볼까?'
"니하오!"
어, 어 그래. 나도 니하오! 여러번 받아온 익숙한 오해였다. 그래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뭐 그게 그거지.
얼마나 지났을까, 뉴델리역에 도착했다. 이 곳이 드디어 각종 삐끼와 사기꾼이 출물한다는 그 유명한 곳이구나. 조심하자.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전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역시나,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내린 전철역에서 빠하르간지로 가려면 뉴델리역 위의 육교를 지나가야 했는데 그 곳에 있는 경비원이 날 못 가게 막았다.
"노 엔트리!"
"하? 와이?"
굳은 얼굴로 다시 한번, "노 엔트리!"
아니 분명히 사람들이 다니고 있잖아! 왜 나는 못 지나가는 건데? 내가 외국인이라 그런가? 역시 뒷돈을 줘야 하나? 내가 인도 루피화를 얼마나 가지고 있던가? 얼마나 줘야 적정선일까?
한참 고민하다가 근처에 정복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 오, 저 사람이 직원인가보다. 달려가서 말을 걸었다.
"나 여기 지나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나?"
그랬더니 그 사람 왈, "아 오늘은 페스티벌이라 특별 패스를 사야 한다. 특별 패스가 없으면 못 지나가!"
가만 있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레퍼토리인데? 인도에 오기 전에 검색해봤던 사기 유형 중에서 제일 유명한 거 아니던가!
분노나 당황보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아 그래 내가 드디어 인도에 왔구나. 여기는 정말 인도였어!'
5초 간의 고민 뒤에 뒤돌아서며 멘트를 날렸다. "오케. 노프라블럼!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랬더니 정복에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를 한 그 사람이 날 붙잡는다. "야 패스 안 사?"
"응. 안 사."
내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 못 가게 막는다. 한참 실랑이를 벌인다. 사! 안 사! 사라고! 안 산다고! 그럼 못 지나가는데? 안 갈 거야!
안 가, 안 간다고! 이렇게 확신을 심어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결국 그 사람은 역내 사무실로 들어가더라. 아무래도 직원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다시 입구로 돌아왔다. 길가를 휘휘 둘러보았다. 오, 점잖아 보이는 노인 발견! 바로 다가갔다.
"투데이 페스티벌 데이?"
별 시덥잖은 놈을 보겠다는 표정으로 노인이, "노!"
역시, 페스티벌 같은 건 없었어. 그러면 어떻게 지나가야 하지? 철도를 가로질러갈까? 기차에 치이지는 않겠지? 아냐 아무래도 무서운데...(그리고 정확히 7일 뒤 나는 델리에서 수천리 떨어진 자이뿌르 철도 위를 한가히 가로지나가고 있었다. 한 손엔 간식거리를 들고선, 기차가 오면 한 쪽으로 비켜섰다 기차가 지나가면 다시 철로 위로 올라가 터덜터덜 걸어갔다.)
다시 육교로 돌아갔다. 여전히 경비원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아닌 것 같기도 하고...몰래 가볼까? 하면서 눈치를 보던 중에 어떤 인도인이 그 경비원에게 말을 걸었다. 경비원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이때다! 육교 위로 뛰었다. 그 사람이 미처 붙잡기 전에. 결국 난 이렇게 육교를 통과할 수 있었다.
'뭐야 올라와 보니 별거 아니잖아.'
이렇게 빠하르간지에 무사 도착했다. 빠하르간지 쪽 출구로 내려오기 전에 역사 위에서 아래를 향해 사진 한 컷. 아! 여기가 인도구나!
뉴델리역 |
'아 이놈들 날 찍었구나. 돈 많은 동북아시아 관광객으로 봤구나.'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 이 정도야 뭐. 베트남이랑 캄보디아에서 자주 겪던 상황이잖아? 이 거리는 날 완전히 봉으로 찍은 거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다음 호텔에 들어갔다. 또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른다. 여기에 가장 좋은 대처 방법은 다른 얘기를 지껄이는 것이었다.
"야 있잖아, 웃긴 얘기해줄까? 내가 오늘 뉴델리역을 지나오는데 역무원이 오늘 페스티벌이라는 거야. 그래서 육교를 못 지나간대! 그래서 어떻게 했게?"
카운터의 직원이 잠자코 있는다.
깔끔하게, "그래, 굿바이!"
다른 곳에 갔다. 비슷한 레퍼토리가 반복되었다.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던 삐끼는 지치지도 않나 보다.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굿 프라이스, 굿 룸이랜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다른 곳에 갔다. 또 다른 곳에, 또, 그리고 또, 또, 또, 또. 열 몇 군데쯤 돌았을까, 드디어 삐끼가 떨어졌다.
이야 드디어 이겼다! 이제 정가로 방을 잡을 수 있겠다. 다음 곳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700루피를 부른다. 이제까지의 가격 중 최저가에 방도 꽤나 괜찮았다. 하지만 협상은 끝나지 않았다.
세금 포함인지 아닌지, 선불인지 후불인지 확인해야 했다. 10분 정도의 협상이 끝날 때쯤 5일 밤을 하루 600루피(10000원 가량)에 빌릴 수 있었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입장에서 이 정도면 꽤 비싼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만족할 만했다. 어쨌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기에 몸을 뉘이고 싶었다.
방을 안내받고는 쓰러졌다.
본격적으로 올드델리 지역 관광에 나선 건 오후 느지막이었다.
올드델리에서 사이클 릭샤 체험. 여기서 도로 연수 며칠만 받는다면 평생 접촉 사고를 낼 일은 없을 것이다. |
올드델리의 시장 |
썩어가는 스쿠터와 염소 두 마리 |
레드 포트 1 |
레드 포트 2 |
이 곳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청년들이 내게 관심을 표하며 다가왔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그래 와이낫?
그런데 낌새가 약간 이상하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 가격을 물어본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건...
이 상황에 딱 맞는 대응을 하기로 했다. 무조건 Cheap이다!
뭘 물어봐도 Cheap, 이것도 Cheap, 저것도 Cheap.
이렇게 말하자 재미가 없었나 청년들이 드디어 물러난다.
레드 포트 3. 내부 지도 |
뉴델리역 외국인 매표소. 이 곳으로 가는 입구에는 항상 삐끼가 어슬렁거린다. |
다음 날에는 아그라행 관광 버스(왕복 8시간, 500루피)를 탔다. 물론 말이 좋아 관광버스다. 버스 안의 에어컨 배출구는 막혀있고 대신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외국인은 역시 나 혼자였다.
관광 버스. 겉보기엔 참 멀쩡하다.(제일 오른쪽거 빼고) |
버스 정류장. |
이 곳에서 밥을 먹으라며 내려주는데, 식당에 줄이란 건 없어보였다. 어미 제비에게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새끼 제비들처럼 계산대 근처로 타원형의 사람떼가 있을 뿐이었다. 나도 그 속에 끼었다가 과자 한 봉지 사고는 밀려났다. 커리를 주문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결국 오늘 점심은 과자 한 봉지...
버스 안에서 과자를 뜯어먹으며 옆 사람과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타지마할이 있다는 바로 그 아그라에 도착했다. 하지만 가이드 왈, 타지마할보다는 아그라 포트를 먼저 간단다. 아 참, 이 가이드는 아그라에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한 순간 멈추길래 다 왔나? 하면서 내리려 했더니 이 가이드가 올라탄 것이었다.
이렇게 도착한 아그라 포트는,
아그라 포트 1. 입구 |
아그라 포트 2. 내부 정원 |
아그라 포트 3. 내부 벽화 |
아그라 포트 4.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인 관료의 무덤 |
다 보고 버스로 돌아오자 이제는 타지마할로 간댄다. 하지만 내려서 본 곳에는 이게 있을 뿐이었다.
타지마할 모형. 너 참 작구나. |
힌디어로 막 말하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이 곳에서 쇼핑을 하고 간다는 것 같다. 나 혼자 외국인이라 영어 서비스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타지마할 모형 쇼핑센터. 인도인들도 딱히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 너희도 쇼핑센터가 일정에 있는 줄은 몰랐구나? |
이렇게 쇼핑센터에서 시간을 한참 끌다가 드디어 버스가 출발했다. 이야 이제는 타지마할이다! 십 분 뒤 도착한 곳은 드디어,
타지마할 입구의 마차 |
타지마할 박물관 |
그리고 드디어 타지마할 |
삐끼의 천국 인도답게 이 곳에서 누군가 따라붙었다. 자기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 무료로 가이드를 한단다. 돈이 필요없단다. 한 번 더 물었다.
"리얼리 노 머니?"
"노! 노 머니! 난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 외국인 친구를 만나고 싶다."
야야 이거 내가 한국에서 많이 쓰던 레퍼토리 같은데..
"그래 뭐 맘대로 해라."
한참을 졸졸 따라다니며 설명을 해준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설명은 꽤나 잘한다. 재미도 있고 흥미도 있고 교훈도 있다. 이런 벽을 가리키며 이런저런 설명도 해준다. 내 기억으로는 이슬람 코란의 한 구절이었던 것 같다. (참고로 인도는 힌두교 국가지만, 타지마할은 이슬람 군주였던 샤자한이 세운 이슬람 사원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금요일엔 이슬람교도 외에는 출입이 금지된다. 그 날은 특별 기도일이란다.)
뜻을 알 수 없는 코란 구절 |
삼십 분 정도 걸려 타지마할 구경이 끝나고 출입구로 돌아오자 가이드가 갑자기 자기 얘기를 한다.
원래 돈을 받으려고 이걸 하는데, 근데 돈을 받으면 좋긴 하고, 내가 원래 대학교에서 관광학을 전공해서 이게 공부기는 한데, 요새 용돈이 좀 모자라기도 하고, 집에 형제도 많고 부모도 있고, 삶이 쉽지는 않은데 돈이 좀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외국인들은 워낙 돈이 많으니, 너도 돈이 많을 것 같기는 한데, 내가 억지로 뺏기는 좀 미안하고, 팁이란 걸 받으면 참 기분이 좋을 것 같긴 한데, 유어 해피 아임 해피 어쩌구저쩌구...
에구 그래 팁 달란 얘기구나. 그런데 어쩌나, 난 현금이 별로 없는데...결국 지갑에서 백 루피(1700원 가량) 꺼내줬다.
그랬더니 궁시렁궁시렁, "다른 관광객들은 천 루피도 주고, 백 달러 주기도 하는데..."
정말?? 백 달러????? 30m 전방에 있는 경찰한테 이 사람을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무렵 그가 내 시선의 방향을 눈치챘다. 경찰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갑자기 싱긋 웃음을 짓는다.
"노프라블럼!"
그러면 그렇지^^
"굿바이!"
그래 굿바이다.
이렇게 인도에서의 이틀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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