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꼬창

태국 꼬창
태국 꼬창(2014)

8/05/2016

페이스북의 무료 인터넷!

몇 년 전부터 페북은 무슨 위성풍선 같은 걸 이용해서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았다. 바로 저개발국가에서 페북을 쓰면 인터넷을 무료로 제공해준다는 건데, 난 이게 그렇게 큰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한국에서 인터넷은 그냥 당연히 저기에 존재하는 거고, 페북은 그 수많은 플랫폼 중의 하나의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베트남에선 그게 아니었나 보다.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현재 베트남의 경제성장률은 한국 고도성장기의 그것보다도 높다. 소득 수준도 중진국 문턱에 와 있는 정도.) 인터넷이 굉장히 빠르게 보급되었는데, 그게 얼마나 빨리 되었느냐 하면 유선인터넷을 접해보지도 않고 바로 WiFi가 보급되었을 정도. 유선인터넷이나 랜선의 개념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다들 WiFi에는 능통하다. 어떤 가게를 가도 WiFi는 기본 옵션이고,심지어 요새 휴양지로 뜨고 있는 다낭을 가면 도심 지역에 City Free WiFi가 깔려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또 충격을 받은게, 베트남에서는 아프리카TV 같은 개인 방송도 페북으로 한다. 베트남에서 이미 페북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창회페이지, 중고판매페이지, 인터넷쇼핑몰, 구인구직까지 이 모든게 페북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네이버나 다음, 싸이월드 같은게 만들어질 시간이 없었으니까...), 개인방송까지 페북으로 할 줄이야. 궁금해서 이것저것 클릭해봤는데 별풍선 기능이 없는 걸 빼고는 아프리카 TV에 비해 딱히 부족해보이는게 없다. 심지어 BJ도 핸드폰으로 방송을 하고, 시청자도 핸드폰으로 방송을 본다!

충격이다 충격... 페북은 진짜로 "Facebook=Internet" 이란 공식을 성공적으로 증명해보이고 있었다.

베트남 회고록 5부 - 동남아는 미개하다?

한국인들 중에 막연히 동남아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동남아애들은 다 게을러"(아침 7시에 대학수업 시작하는 베트남은?? 아침마다 불교사찰 가는 미얀마는??) "동남아는 다 못 살아"(한국 소득 2배에 달하는 싱가포르와 브루나이는?? 또 국민소득 1만달러 넘는 말레이시아는??)\

얼마 전에도 그런 사람을 한 명 만났다. 동남아는 미개하고 게으르다는 소리를 하면서 자꾸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하던데, 중간에 이런 말도 하더라. "저어기 태국 베트남 그런데가 다 같은 시간대 쓰는 거는 옛날에 프랑스 식민지였어서 그래." "베트남에 반미라고 바게트샌드위치가 있거든. 그거도 프랑스 식민지 영향이지." 그러길래 못 참고 반박을 했다.

"태국은 한번도 식민지화를 당한 적이 없는, 심지어 2차대전때 일본 동맹 추축국이었고요. 그리고 베트남이 태국 시간대 쓰는게 식민시대 유산이라면 한국도 옛날에 일본 식민지였어서 도쿄랑 같은 시간대 쓰는 건가요? 또 베트남 샌드위치가 맛있는 게 덕분이라면....아! 서울 4대문 내에 있는 일식집들도 일제의 유산인거겠죠?"

라고 했더니 버벅거리다가 겨우 하는 대답이 "아니 서울이랑 도쿄 간 거리는 태국이랑 베트남 사이 거리보다 가깝잖아..." 라고 하던데

지도 좀 보시죠. 전자가 후자의 2배는 됩니다만...

하여튼 한국인들은 옛날에 중국이 저개발 상태일때는 중국인들 게으르다, 냄새난다, 가난하다 하면서 욕하더니. 이제는 중국이 커지니까 중국한텐 깨갱대고 대신 동남아 가서 화풀이한다. 그 쪽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인규규모로 보나 한국이 전혀 무시할 만한 대상이 아닌데 말이죠.

7/06/2016

대만 여행 후기

대만 여행 (2016년 5월)

7일의 시간 동안 대만을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골고루 훑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뻔한 관광코스는 제외하고 현지인 생활 공간 위주로. 그리고 그 후기.



1. 일본인

 대만에서도 일본인의 이미지나 평판은 굉장히 좋다. 대만 여행 초반에는 한국인인 척하고 다녔다가 (그러고 보니 나는 원래 한국인인가? 헷갈..) 타이중의 박물관 매표소에서 "니혼진데스까 칸코쿠진데스까"라는 매표원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니혼진데스" 라고 말한 다음부터는 그냥 일본인인척 하고 다녔다... 사실 이 편이 대만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더 쉽다. 이쿠라데스까 하잇 도모아리가또! 정도는 다들 알아듣더라.



2. 오토바이

 대만에서 오토바이들은 좌회전시에 꼭 P턴을 하듯이 돌아줘야 한다. 정확한 표준 P턴은 아니고, 직진하는 척하다가 90도로 방향을 틀어서 왼쪽을 바라본 후에 잠깐 멈추고 난 후에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대만에서 오토바이가 딱히 천대받는건 아니고 어딜 가나 오토바이 주차장이나 대여샵 등이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수단인데 도대체 이런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요상한 P턴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3. 쓰레기

 대만의 길거리에선 두 가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쓰레기와 쓰레기통. 쓰레기통을 찾기가 쉽지가 않음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를 길가에 버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다들 가방 안에 쓰레기주머니를 만들어서 다니나 싶을 정도다.

 또 집안쓰레기를 버릴때마저도 깔끔함을 보여주는데, 다들 집안에 재활용통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가 동네에 쓰레기차가 와서 띠리리링 사이렌을 울리면 다들 착하게 몰려가서 얌전히 쓰레기를 건네준다.



4. 정숙함

 대만 사람들은 정말 조용하다. 서울역만큼 큰 타이페이기차역을 몇 번 들렀었는데, 갈 때마다 그 큰 홀의 무서우리만치 조용함에 섬찟할 정도였다. (대만도 표준중국어를 쓰니 중국어가 성조 있는 언어라 시끄럽다는 논리는 여기서는 설 곳이 없다.) 한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살짝 귀기울여보면 백프로 한국인 아니면 본토중국인이다.

 대만의 관광객은 본토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순으로 많다는데 솔직히...한국인만 눈에 엄청 뜨인다. 본토중국인은 어차피 같은 중국어를 쓰니 잘 섞여들어가고, 일본인은 벙어리인가 싶을 만큼 조용한데, 한국인들은 거침없이 한국어로 떠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만을 갔다왔던 한국인들은 "야 대만 관광객 절반이 한국인이야!!" 그러는데 흠 글쎄요...대만인 친구에게 부탁해 받은 공식 통계를 한 번 살펴보았더니, 작년에 대만을 방문한 본토중국인은 420만명, 일본인과 홍콩인이 각각 160만명이었고 한국인은 고작 65만명이었다. 심지어 동남아시아 국적 관광객도 150만명이었다. (물론 거긴 인구가 6억이지만) 어쨌든 결론은 한국관광객은 전체의 10퍼센트도 안된다는거...한국인이 많아보이는건 아마도 시끄러워서일거라는거...



5. 음식

 대만의 먹거리는 소문대로 가히 최고였다. 맛이면 맛, 멋이면 멋, 거기에 청결함과 적당히 착한 가격은 두말하면 잔소리. 외국인이면 한두번쯤 바가지를 쓸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손님을 은근히 배려하는 자세를 보여줄 뿐. 일본만큼 과도한 친절은 없었지만 손님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친절을 베푸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좋았다.



6. 총평

 별로 기대치 않았던 대만 관광은 굉장히 만족스러웠고,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재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볼 것은 별로 없지만 현지 사람과 음식이 너무나 좋았다.) 한국도 이런 점에선 대만을 본받아야한다. 한국 관광객 중 절대다수가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짱깨짱깨 그러면서 무시하질 않나 바가지를 된통 씌우질 않나...(아무리 짱깨짱깨 그래도 최소한 내가 지금까지 중화권을 네 번 여행하면서 만났던 짱깨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었다!) 한국을 한번 왔다간 관광객들의 재방문 비율이 일본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데, 나라가 좁다고 조상 탓하기 전에 우리들의 태도를 먼저 돌아볼 일이다.

 대만이 최근 몇 년간 중국발 악재에 시달리게 되어 현재 GDP는 한국보다 낮을지 모르지만 국민의식은 확실히 한 수 위로 보였다. 선진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건 그런 수준높은 민도가 아닐까. 누가 그랬던가? 헬조선을 만드는 건 한국인 본인들이라고.


쉐프들의 자신감이 엿보이는 음식적 벽면광고

비오는 날 멀리서 찍은 타이베이101 빌딩

중국의 국부라 불리는 쑨원의 동상

시내 한복판에서 중국 정부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이는 파룬궁 수련자들

장제스 기념관. 실제로 보면 더 거대하고 웅장하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기차역의 초밥 체인.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찍은 풍경

가오슝의 항구에서 찍은 사진

타이중에서 렌트했던 스쿠터와 함께. 햇살은 더웠지만 바람이 너무도 시원했다.

야시장의 흔한 모습. 대만 야시장 먹거리는 정말 맛있다!

5/19/2016

베트남 회고록 4부-반한감정

약 2년 전에 네팔의 히말라야를 올랐던 적이 있다. "요새 젊은 것들은 패기가 없어!" 라는 어르신들의 말에 반발심도 있었던지라 혼자 오르기로 결심했었는데(하지만 결국 가이드와 동행) 나는 그 곳에서 한국 어르신들의 어마어마한 패기를 목도하고 말았다. 취사와 쓰레기 투척이 금지된 해발 3천미터에서 라면과 김치찌개를 끓여먹고 막걸리를 마신 뒤에 취해서 네팔인 가이드에게 "야 이 놈아 춤춰봐!"라고 소리를 지르는 대단한 분들이 계셨던 거다.

거기다가 그 요리를 굳이 해먹겠다고 버너, 밥솥, 반찬, 쌀 등을 챙겨가 짐꾼 한 명당 80kg의 짐을 들고 오르게 하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마실 물 하나 들지 않고, 각종 등산모자 등산복 등산화 스틱 아이젠 등으로 무장한 상태였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 짐꾼들은 80kg의 짐을 지고 다니면서도 제대로 월급을 받지 못해 허름한 셔츠에 쪼리를 신고 해발 4,5 천미터를 오르고 있었는데 그런 대단한 일을 시키는 것이 패기라면 나름의 패기렸다. 사진 1에 보면 "한국 막걸리 팝니다. 환영합니다."라고 나와있는데 이게 진짜 환영의 의미일리도 없고, 오히려 사진2의 "No 아이젠 please"가 네팔의 자연과 현지인들을 마구 대하는 한국인들의 이미지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다가 한국내 네팔인 노동자들이 학대받는 문제도 있어서 네팔 내에 반한감정이 꽤 존재하는 편인데, 과연 베트남은 어떨까?

베트남에 한 번 와본 한국 여행자들은 이 곳이 가히 천국이라고 말한다. 한국이라면 다들 좋아하고, 물가가 싼데다 놀거리가 풍부하다고. 나도 처음엔 마냥 베트남이 좋았다. 그런데 그건 지극히 여행자의 단편적인 입장일 뿐이고, 정작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많은 게 다르게 보인다.

먼저 베트남 내 한류를 얘기해보자. 베트남 내 한국 노래와 드라마가 많이 퍼져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이미지가 좋은 건 아니다. 일본의 만화와 av가 한국에 많이 퍼져있다고 해서 많은 한국인들이 친일을 하는 것은 아니듯이,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좀 좋아한다고 해서 베트남인들이 친한인 것은 아니다. 심지어 최근에 '태양의 후예'라는 군대 드라마가 베트남에 수입되면서 베트남 내 논란이 일어났는데, 주 요지는 "베트남전 때 민간인들을 학살,강간한 한국군 미화 드라마에 반대한다."이다.

베트남 중부에 가면 한국군 증오비라던가 공동묘지에서 추모를 올리는 모습을 꽤 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마을에서는 전후 4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어느날 한국군이 와서 우리를 구덩이에 몰아넣어 쏴죽이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아가야"라고 자장가까지 부른다고 카더라. 그런데 한국에서는 월남전 용사님들께서 자신들의 행위를 미화하기에 바쁘다. (베트콩을 몇 명 죽였다고 자랑하기도 하던데 그 베트콩은 당시 베트남의 독립군이었다.)

한-베 역사는 일-한 역사와 거의 비슷하다.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한국에 와 독립군을 죽이고 여자들을 위안부로 데려갔듯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베트남공산군(다시 말하지만 분명 독립군이다! 뇌리에서 공산당 나쁜놈들 배트콩 빨갱이들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면 한국식 세뇌 교육을 탓할 필요가 있다.)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해 수많은 라이따이한이 양산되었다. 왜 이 사실이 한국 역사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지는 뻔하다.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 민족이거든요... (그런데 교과서에서 고구려는 말갈인들을 복속시키고 고구려인들이 지배층으로 있었던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기술하는데, 말갈인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에서 쓰기 때문에 이에 대해 더 이상 태클을 걸 마음은 없다. 다시 오늘날의 문제로 돌아와보자. 나는 내 오토바이가 있어서 택시를 거의 안 타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탈 일이 있다. 타고 가는 동안 택시기사하고 베트남어로 얘기하다보면 으레 나오는 질문이 있다. "한국 아저씨들은 왜 그렇게 베트남 아가씨를 좋아하냐? 가라오케에 가서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마시나?" 정말로, 수 십번 들은 질문이지만 아직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적나라하고 쪽팔린 극사실적 질문이다.

베트남 젊은 친구들을 만나도 술 좀 들어가면 꼭 받는 질문이 "왜 한국인들은 베트남에 와서 베트남인을 무시하고 깔보나? 왜 베트남이 가난하다고 무시하는가?"이다. 정말로 웃긴게, 베트남에 와서 자신이 뭐라도 된듯이 착각하는 한국 여행자들이 꽤 있다. 예전에 갔던 라이브 클럽에서는 술에 취한 아저씨 여행자 두 명이 스테이지에 뛰어올라 똥배를 튀기며 "아이엠 코리안!"이라고 자랑스럽게 외치는 경우도 있었는데(그러면 베트남 여자들이 알아서 달려올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 뒤 일은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어깨들에게 끌려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난생 처음 클럽에 와서 너무 신나 그런게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해본다. 이전에 클럽을 가본 적이 있다면 그런 식으로 여자를 만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한데, 아니면 베트남이라고 쉽게 보았나?

몇 년 전에 부산에서 베트남 새댁이 정신병자 남편에게 맞아 죽었을 때는 베트남 내 여론이 정말 안 좋아져 교민들이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를 극복하기 위해 교민들은 자발적으로 헌혈 운동에 나서 자신들의 피를 베트남에 바치고 나서야 극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던데...

모든 한국인이 나쁜 것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원천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닐진대 이런 오해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접하면서도 파워 차이가 나는 나라들끼리는 으레 오만과 편견의 관계가 성립되기 마련이다. 중국-한국, 인도-네팔, 일본-한국, 한국-베트남의 관계를 두고 보면 전자는 항상 후자를 오만하게 깔보고, 후자는 전자를 편견이 가득찬 시선으로 쳐다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만연한 베트남에 대한 오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베트남 회고록 3부-소유와 존재, 그리고 꼴갑

헬조선 열풍이 불면서 이민 바람이 불고 있다. 나는 한국인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려면 반드시 적용해봐야할 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살기 좋다'는 그 나라가 과연 내국인이 살기 좋은 것인지, 외국인이 살기 좋은 것인지.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인구 다양성이 적고 폐쇄적인 북유럽 같은 곳에 가서 낯선 아시아 인종으로 살아갈 자신이 과연 있는지? 캐나다, 미국, 호주라고 별반 다를까? 아니다. 그 곳에서도 한인들은 한인들끼리 수다를 떨고 한국 신문을 보고 한국 드라마를 본다. 그렇다면 외국인으로 살기 좋은 나라는 어디가 있을까? 요새 여행으로 한창 뜨는 동남아-베트남, 태국 이런 나라? 한 번 생각해볼만한 문제이다.

예전에 인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인도 여행에서 꼭 빠지지 않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갠지스 강가이다. 한쪽에서는 시체를 화장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개들이 새끼를 낳아 기르는, 또한 밤에는 기이한 축제가 열리는 전설의 장소가 갠지스 강가다. 남들 다 간다는 이 장소에서 나도 며칠 동안 앉아서 인간(또는 시체) 군상을 바라보며 생각을 좀 해봤는데, 아무리 봐도 죽음이라는게 허무했다. 크샤트리아 계급이든 수드라 계급이든 똑같이 불타 없어지는걸 보면서 공수래공수거를 제대로 느꼈달까.

에리히 프롬의 역작 [소유와 존재]를 보면 소유적 실존양식을 배제하고 존재적 충만감을 느끼기 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식이 기술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대략 '자기를 새롭게 하는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운명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아득한 목표지점이 어디에 있든 간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생명의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실존적 인간의 올바른 행동양식이다.

얼마나 멋있는가. 무소유 사상과도 통하는 개념인데, 실제로 무소유로 세상을 살아가면 무서울 것이 없다. 가진 게 없으니 뺏길 게 없어 두려울 게 없고, 생명조차도 자신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자각하면 삶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나는 호치민에 혼자 살면서 그 존재적 삶의 방식을 영유하려고 해봤다. 내가 좋아하는 베트남어를 배우고, 영화와 뮤지컬을 보고, 발리우드 댄스를 배우며, 베트남 친구들을 만나 같이 배낭여행을 다니며 충분히 삶을 즐겼더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불편한 진실을 깨달았다. 나는 소득과 물가의 차이를 이용해 건물주 아들급의 부유한 백수 생활을 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나는 '소유'가 아니라 '소위 꼴갑'을 떨고 있었던 거였다.

베트남에서 영화 한 편이 3천원이라지만, 영화관 알바생 시급은 700원이다. 발리우드 댄스 강습은 시간당 4천원이지만 댄스 홀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월급은 15만원이다. 기름값은 리터당 700원이지만 택시기사의 월급은 월 30만원 언저리이다. 베트남의 물가가 한국인이 느끼기에 싸다고 해서 그 업에 종사하는 베트남인에게도 똑같이 싼 것은 아니었던 거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서민의 삶은 고달프고, 부유층은 여유롭게 살아간다"

다시 첫 문단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돈 많은 한국인이 부유층으로 행세할 수 있는 베트남은 과연 천국일까? 베트남에 사는 한국 교민은 대략 15만명이다. 과연 이 15만명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냐면...글쎄. 베트남에서도 한국인들의 이미지가 급격하게 하락하는 중이다. 십 년 전 필리핀의 모습이 재현된달까. '마싸랍 코리안!'처럼.

베트남 내 거의 모든 지역을 다녀보고 단 하나의 절대 법칙을 발견했다. "한국인 접촉도와 호감은 반비례한다." 한국인을 많이 접해본 지역일수록 한국인에 대해 반감을 더 크게 가진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 답은 의외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4/01/2016

베트남 회고록 2편-헬조선


며칠 전에 오세훈 씨께서 "헬조선? 개도국에 한 달 살면 한국에 자부심 생겨"라고 하셨다. 총명하신 분께서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닐 테고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테지 싶어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무슨 자격으로? 개도국만 10여 개국 배낭여행을 다녀봤고, 지금도 개도국에 7개월째 살고 있으니 저도 좀 할 말이 있지 말입니다.

베트남에 살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점은 이 나라에 희망이 넘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 중에 자국의 미래를 비관히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이 고도성장기 (1960-2000)에 연평균 5.9%의 경제성장을 이뤘다지만 베트남은 개혁개방정책 이후로 30년째 6% 이상의 더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그걸 반영했는지 젊은이들의 씀씀이도 거침이 없다. 

세 달 월급을 모아 아이폰 신상을 일시불로 사버리고, 일년치 월급을 아껴놓았다가 야마하 오토바이 신형도 바로 질러버린다. 이렇세 돈을 많이 쓰는 것에 대해 궁금증을 못 참고 물어본 적도 있지만 그들의 대답은 "괜찮아. 내년엔 월급이 더 높아질 거거든"이었다. 실제 베트남의 최저임금 연평균 상승률은 12-15% 에 달한다. 한국으로 치면 편의점 시급이 매년 천원씩 올라가는 셈이다.

개도국의 미래는 이렇게 밝다. 아니, 미래가 밝으니까 개도국 아닐까? 빚을 내서 아파트를 사면 매매가가 하늘도 뚫을 기세로 오르는, 그런 낙관적인 상황이 이 나라를 점령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도국에 살면 한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는 얘기가 미래 관점에서 본 건 아닌거 같고, 과연 그럼 현재 관점은 어떨까?

좀 속물적으로 보자면, 장담컨대 베트남에 살고 있는 한국 청년들은 누릴 거 다 누리면서 행복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 물론 물가 차이에서 비롯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쌀국수 한 그릇이 1500원이고 맥주 한 캔이 500원이고 택시 기본 요금이 300원으로 시작하는 곳에서 한국 청년들이 불행을 느끼기란 어쨌든 쉽지 않다. 

이 곳 베트남은 아니고 조금 먼 나라, 인도 이야기기는 하지만 그 곳에 가면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일본 청년들이 많다. 반 년은 일본에서 편의점 알바를 해 돈을 모으고, 반 년은 인도에서 풍족하게 누리는 생활을 몇 년째 하는 거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 이상, 인생을 그리 즐기지 못하란 법이 없지 않은가? 80년대 엄청난 부동산 버블로 인해 자국 내에 집 살 생각을 버린 일본 청년들은 그렇게도 살아가는데, 한국의 청년들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베트남에 산 지 7개월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한국에 자부심이 들지 않는다. 

아! 지금 나는 여기서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한국 기업은 최악의 근무조건을 자랑한다. 항상 반복되는 야근과 회식은 그들의 일상이다. 한국인들의 일에 대한 열성은 베트남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데, 어학당 선생님들마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이다. 어떻게 아냐고? 왜냐먄 회사원 아저씨들이 야간 코스를 등록해놓고 수업 때마다 야근과 회식이 있다며 결석 통보를 하기 때문에...

아무튼 그렇게 어학당 선생님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때면 주변의 외국 친구들은 나를 돌아보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그러고보니 이런게 바로 자부심을 느끼는 포인트구나!

3/31/2016

베트남회고록 1부-그간의 베트남 생활을 정리하며...


베트남을 드나든지 어느덧 2년이 되어가고, 베트남 출입국 도장과 비자로 여권이 도배되어 가는 상태에서 그간의 베트남 생활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 불편할 수 있으니, 얼마든지 넘기셔도 됩니다^^


내가 베트남에 처음 왔던 것은 2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홀로 백 일간의 남아시아 일주중이었는데 베트남 방문 직전까지만 해도 베트남에 대해 정말 몰랐다. 단지 아는 거라곤 베트남 국제결혼과 쌀국수뿐이었고, 그마저도 편견에 가득 찬 상태였다. 솔직히 고백컨대  당시 내게 베트남 여행이 갖는 의미는 '상상 이상으로 위험할 나라인 인도를 가기 전에 적응겸 들르는, 역시 소매치기가 많은 나라'뿐이었다.

그러나 북쪽의 하노이부터 호치민까지 여행하며 그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원래는 7일만에 찍고 옆나라 캄보디아로 튀어나갈 생각이었는데, 정확히 이틀째부터 베트남에 대한 사랑에 빠져들면서 출국을 계속 미루어댔다. 신기한 건, 누군가 내게 "왜 베트남이 좋아졌냐?" 고 물으면 아직까지도 그 대답을 확실하게 할 수가 없다. 음식(고수, 향채, 염소고기, 개구리고기를 모두 아울러서), 문화(유교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사람들(보고 있으면 자꾸 정이 드는), 경제 발전까지 모든 게 다 좋았다. 돌아가서, 결국 그 때 난 무비자 입국기간인 15일을 다 채우고서야 아쉬운 마음에 못내 종지부를 찍고 이 나라를 떠나게 되었었다.



그렇게 베트남을 떠나고 다음으로 캄보디아, 태국, 인도, 네팔까지도 갔었는데, 베트남에 대한 추억이 계속 아련히 남았다. 심지어 히말라야 산맥에 올라 밤중에 별을 보면서도(해발 4천 미터에서 보는 밤하늘은 가히 환상적이다! 구름들은 내 발 밑에 있고, 별 속을 헤엄치는 듯한,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다) 베트남 친구들과 쌀국수를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결국 남아시아 일주는 어쨌든 끝났고 나는 귀국, 복학했는데 베트남에 대한 기억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밥을 먹을 때면 고수향이 고팠고, 술을 마실 때면 사이공비어가 그리웠다. 6성조를 자랑하는, 마치 노래와도 같이 아름다운 베트남어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이 때 베트남에 대한 책과 신문기사도 정말 많이 읽었었고 베트남 유학생들도 많이 만났었다. 그렇게까지 해도 너무 아쉬웠던 나머지 나는 이후 대학교 방학이 될 때마다 베트남을 방문했고, 총 3회 방문 40일간의 여행 기록을 자랑하게 되었다.(40일을 다녀도 여전히 새로운 볼 거리, 놀 거리, 먹을 거리는 넘쳐난다.)




 시간은 계속 흘러 이윽고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베트남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벗어나려는 시도도 안 해봤다. 남들이 베트남을 더럽다, 오토바이 시끄럽다고 욕할 때 나는 그 더러움마저 정겨웠고, 오토바이야 뭐...내가 원래 타던 거니까^^ 결국 졸업 후에 나는 취업 자소서조차 한 번 쓰지 않고 바로 베트남행을 택했다. 그게 바로 7개월 전에 청년 사업가 프로그램을 활용해 하노이에 온 계기였다.

(계속)










3/07/2016

미얀마를 여행하며

미얀마를 여행하며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적어볼까 한다.

캄보디아와 미얀마에서는 유독 달러를 많이 쓴다. 과거 내전(또는 국내 대립)의 영향으로 자국 화폐가 평가절하당했기 때문일 터인데, 흥미롭게도 달러를 취급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캄보디아에서는 왠만큼 더럽거나 구겨진 10달러짜리도 잘 받아주는 한편, 미얀마는 고액권 100달러짜리가 아니면 환율을 낮게 쳐줄 뿐더러, 100달러짜리를 낸다 하더라도 접힌 자국 하나까지도 돋보기를 들이대고 꼼꼼하게 찾아내 환율을 깎아버린다.

반면 자국 화폐 사용에 있어서 미얀마와 인도의 차이도 흥미롭다. 미얀마는 달러에는 매우 엄격한 대신 자국 화폐 쨧에는 매우 너그러워서 메모지로 쓰거나 더러운 걸 닦는데 쓰기도 하는데, 인도에서는 자국 루피에 왠만한 흠이 있으면 위조지폐로 의심하고 거부해버린다.(그럴 수밖에 없는게 인도에서는 atm에서 위폐가 나오기도 한다!!)

이처럼 생각해보면 화폐는 결국 인위적인 가치 결정에 따른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그걸 돈으로 쳐주면 돈인 거고, 돈으로 안 쳐주면 돈이 아닌 거다. 캄보디아에서 쓰이는 꼬질꼬질한 달러가 미얀마에 가면 휴지 조각이 되듯이. 그렇기 때문에 돈은 결코 인간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고, 수단으로서만 작동해야 하는데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강신주의 [감정 수업]이라는 책에 보면 대강 이런 말이 나온다. "진정 행복해지려면 돈을 쫓으면 안 된다. 자신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 임금을 계산하고, 그 만큼을 벌고 나면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본주의를 배격한 저자조차도 어느 방송에선가 '스스로도 돈 욕심을 버릴 수 없음'을 고백했으니 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역시 나만 해도 그 화폐 조각(미국 연준이 발행한, 이젠 더 이상 금과 바꿔주지도 않는)들을 들고 미얀마에 와서 편하게 여행하고 있으니 뭐라 할 처지는 못 된다.

2/20/2016

베트남은 빠르게 변화한다.

 한국처럼 설을 쇠는 베트남. 설을 기해 내가 사는 동네의 음식값이 꽤 올랐다. 작년까지만 해도 30000동이었던 쌀국수가 35000동이 되고, 35000동이었던 갈비밥은 40000동이 되었다. 상승률로 따지면 15%정도이고, 한국 돈으로 하면 이제 200원 정도가 올라 2000원이 된 셈이다. 한국과 비교하면 분명 싼 가격이지만, 베트남의 물가 기준으로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껏 식비로 하루에 5000원을 썼는데, 이제부턴 6000원을 써야 한다. 한 달에 3만원씩이 더 들어가는 셈이다.

*베트남의 물가는 날이 다르게 급상승 중이라, 일부 식당이나 카페를 가면 메뉴판에 가격이 안 써있거나 보드마카로 그 달의 가격을 휘갈겨놓은 경우도 있다.

 우리가 "외국은 살기 좋다"라고 말할 때 "살기 좋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상반된 경우가 있다. '내국인으로서 그 나라에 살기 좋다' 또는 '외국인으로서 그 나라에 살기 좋다' 이렇게 두 가지이다. 북유럽 국가는 전자에 해당하고, 개도국 중 발전중인 나라(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쉽다. 한국인이 스웨덴에 이민을 가려고 할 경우에는 배관수리공 같은 3D직업을 택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인도네시아에 가서 배관수리공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소득과 물가의 국가별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한국에서 열심히 일해 저축한 2억원을 스웨덴에 들고 가봤자, 몇 년 생활비로 다 써버릴 게 뻔해 당장 노동력을 바치고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해야 하지만, 베트남에 2억을 들고 오면 최소한 대형 식당 하나는 번듯하게 차릴 수 있다. 물론 2억을 들고 와 베트남에 식당을 차렸다가 현지 법, 문화, 언어를 몰라 쫄딱 망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다만 어디까지나 2억의 자금력으로 가능하긴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베트남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주재원들의 생활을 한 번 볼까. 십 년 전에 주재원들은 호화로운 궁전식 아파트에서 가정부를 두세 명, 운전기사를 한 명씩 부리며 왕처럼 살았다.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사실이 그랬다. 십 년 전에는 가정부 한 명의 월급이 50달러도 안 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운전기사? 사장이나 법인장들은 한 명씩 데리고 다니지만 과장급 이하로는 꿈도 꾸기 힘들다. 전속 가정부? 요새는 한국인들이 소형 주택에 모여 살며 한 명의 청소원이 여러 집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인건비가 빠르게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역시 물가도 빨리 치고 오른다. 첫 문단에서 말한 식비. 십 년 전엔 500원으로 쌀국수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500원으로 생수 한 통이나 겨우 사먹는다. 이십 년 전엔 대학생 하숙거리의 방값이 한 달에 만 원이었다. 외국인들이 많아진 지금은 적당한 방 하나에 삼십만원까지 가는 곳도 있다. 베트남의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물가는 더욱 빨리 올라갈 것이다. 베트남인들의 월급도 같이 올라갈 것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베트남의 경제는 더 이상 '외국인이 살기 좋은' 수준이 아닐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이 자가용을 한 대씩 보유할 것이다. 시내의 고급 음식점과 바는 베트남 중산층으로 가득찰 것이다. 아리따운 베트남의 여성들이 술집과 마사지샵에서 외국남자들을 환영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지금 길거리에 나가면 아름다운 베트남 여성들과 거리를 활보하는 외국인 남성들이 한보따리다. 그 때문에 베트남 남성들의 불만이 꽤 크다. 호치민시티에 와서 가라오케와 여자 없이는 못 사는 한국 아저씨들 덕분에 호치민의 베트남 남성 중 한국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택시만 타면 택시기사가 "너도 베트남 여자 좋아하냐?"라고 물어볼 정도다. 한류? 적어도 호치민시티에서는 한류를 찾아볼 수 없다. 간간히 한국 드라마와 노래를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한국에서 스페인어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비율하고 비슷할 것이다.

 베트남의 경제는 나날로 발전한다. 한국이 고속발전을 했다는 1960~2000년 사이의 한국의 경제성장률 평균은 연 5.9%였다.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한 1986년 이래로 베트남의 경제성장률은 한 번도 6%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지금의 베트남은 한국의 90년대 수준에 와있지만, 앞으로 20년이면 베트남은 한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 비교로만 봐도 베트남의 인구는 1억으로 남한의 두 배이다. 베트남의 남북 길이는 2500km로 서울-부산의 5배에 달한다. 게다가 베트남은 인구 평균 연령, 쌀 수출량, 커피 수출량, 광물 매장량에서 모두 세계 탑 순위권에 들어간다. 심지어 앞바다에서 석유도 펑펑 난다.

 한 가지 슬픈 점은 그 때가 되면 베트남은 외국인이 살기에 더 이상 적합한 나라가 아닐 거라는 점이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아있는 셈이다. 완벽한 베트남인으로 변모하든가, 적당히 즐기는 외국인으로 살다 쫓겨나든가.

2/17/2016

베트남과 한국의 시각 차에 대하여

 동일한 현상을 두고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나라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끼리도 그러할진대, 서로 다른 나라 사람끼리는 어지간할까? 한 예로 동해-일본해 표기가 있겠다.

 동해-일본해 표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베트남에도 동해가 있다. 그건 바로 남중국해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중국의 남해는 분명 베트남의 동해다. 그러니 베트남에서는 이걸 동해라 부르는 것이 당연한 셈이다. 이건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입장 차이이고,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도 이런 일이 꽤 있다.

 예를 들면 월남전. 한국에서는 베트남 통일전쟁을 월남전이라 부르지만, 정작 월남(베트남)에서는 그걸 미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조국의 통일을 훼방놓던 미국군을 몰아낸 전쟁이니 당연히 미국전쟁이란 것.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같은 관점에서 미국군을 도왔던 한국군은 베트남에 전혀 보탬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국국은 나름대로 자유 월남을 돕는다고 참전했겠지만(뭐 돈 문제도 있었을 거고), 전후 통일 베트남이 볼 때 이거는 베트남의 통일 전쟁을 방해했던 귀찮은 외국군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역사는 승자의 것이 아니던가?

 이런 식의 입장 차는 다른 사안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오자이를 예로 들어보자. 베트남에 여행을 한 번이라도 와봤다면 반드시 봤을 아오자이. 많은 외국인들이 이 옷에 가히 환장한다. 너무나 섹시하다나. 그런데 과거에 베트남 정부가 이 아오자이에 금지령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금지령의 요지는 "착용이 불편해 노동에 지장을 초래한다." 였지만 신기하게도 이게 한국인들 사이에는 '아오자이가 너무 퇴폐적이라 금지되었다'는 이상한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아오자이가 분명 섹시한 옷이기는 하지만 베트남 정부가 과연 그런 이유로 금지를 시켰을까?

 다음으로 달랏 여자들. 호치민시 근처(라고 해도 버스로 7시간 걸린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2500km에 달하는 긴 나라이다. 종단 기차가 이틀이 넘게 걸린다.) 에 달랏이라는 해발 1500m 고원 지대가 있는데, 프랑스 식민 시대에 프랑스인들이 휴양지로 개발하면서 준대형급 관광 도시로 성장했다. 이 곳 달랏은 여러 특산물로 유명한데, 달랏 여자들도 이쁘기로 소문이 나 있다. 특히 달랏 여자들은 피부가 너무나 하얗다는 것.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달랏 여자들의 피부가 하얀 이유에 대해 베트남인과 한국인들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거다. 베트남인들은 "달랏은 고원지대라 날씨가 시원하고 사계절이 분명해 피부가 잘 타지 않아 하얗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은 "과거 프랑스인들이 달랏에서 오래 살다가 혼혈이 많이 생겨서 여자들이 하얗고 이쁘다."는 주장을 한다. 이 주장은 좀 부끄럽지 않은가?

 자매급으로 황당한 소문이 또 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였다 보니 프랑스에서 제빵 기술을 들여와서 banh mi라는 바게트빵을 잘 만든다."라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있는데, 그러면 서울 시내 유명한 일식당은 일제 식민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승된 것인가? 어떤 영국인이 서울에 와서 스시를 먹어보고는 "오 역시 한국은 일본 식민지 영향을 받아 스시가 맛잇군요!" 하면 한국인들이 참도 좋아하겠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했던 기간과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던 기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면 베트남이 프랑스 영향을 받아 빵을 잘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주장인지는 뻔하다.

 물론  베트남이 항상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한국인이 옳을 수도 있고,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베트남인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를 분석할 때는 균형잡힌 시각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제 멋대로 쉬운 해석을 내려서는 곤란한 것이다.

7/26/2015

중국 여행 1부 - 황샨(황산)

오늘은 황샨(황산) 1일 코스에 대해 써볼까 한다.

보통 황샨은 하루만에 절반을 둘러보는 코스가 있고, 이틀 혹은 사흘을 잡고 산 위에 숙박하며 일출, 일몰, 절경을 모두 둘러보는 코스가 있는데 한국인은 빨리빨리 정신으로 당일 등산을 많이 한다. 

나도 그 중에 속하는지라 당일 코스를 선택했는데 이왕 올라간 거 다 보겠다는 정신으로 열심히 걸어서 산 전체를 빙 둘러보고 왔다. 등산 전날 내가 호스텔 매니저에게 내 계획을 말하자 미친X 취급을 했지만 난 결국 해냈고 다음날 매니저는 내가 신기록을 세웠다고 칭찬하더라. 나를 따라서 당일치기로 바쁘게 다녀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정표를 정리한다. 이 글을 참고하는 모두가 부디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툰시(황샨의 근처의 거점 도시)에서 황샨을 향해 출발하는 버스는 대개가 오전 6시에 출발한다. 때문에 탕커우 마을(황샨 바로 아랫마을)에 도착하는 버스는 모두 다 같이 7시 즈음에 도착하는데, 이때가 관건이다. 수십 대의 버스가 몰려드는 그 순간에서 긴 줄을 피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줄을 향해 뛰는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육교가 보일텐데 그 위를 달려가 건너 내려가자.

그러면 매표소와 긴 줄이 보일 건데, 이 때 매표소로 가면 안 되고 바로 줄 뒤로 가서 서야 한다. 매표소 가는 시간조차 아깝다.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건물 안으로 진입하는데 건물 안쪽에 보면 매표소가 또 있다. 이제 여기서 표를 사면 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밖에서 사왔기에 안쪽에는 줄이 없어서 안에서 사는 것이 훨씬 빠르다.


줄을 서서 들어간 건물. 저 줄 끝이 드디어 케이블카행 셔틀 버스를 타는 곳이다.

저기 끝에 조그만 창구가 매표소이다. 윈구(원곡) 케이블카 티켓을 사자. 가격은 19위안.



 셔틀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기점으로 오면 8시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케이블카를 타러 가면 된다.




케이블카 기점에 도달했다. 여기서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자.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뛰었더라도 보통 이런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이 정도 줄이라면 1시간 반 정도 대기하게 된다.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윈구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길.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한 컷.


케이블카에서 내리자 9시 30분 정도였다. 이제부터 부지런히 등산을 시작하자.
참고를 위해 포인트별로 나의 도달 시간을 적자면 다음과 같았다.

시신봉(beginning to believe) 9시 50분
사자봉(Lion Peak) 10시 30분
백운정(Cloud dispelling pavilion) 11시

이 코스가 절대로 쉽진 않을 것이다.
거의 속보로 산행을 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서해대협곡은 꿈도 꿀 수 없기에 서둘러야만 한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저 소나무와 바위가 유명하단다.


파노라마로 찍은 풍경




11시에 백운정에 도착하면 잠시 쉰다. 이제부터 진입할 서해대협곡은 최소한 3시간이 걸린다. 트레킹 지도에는 6시간 정도라고 나와있지만 한국인의 정신을 발휘해주면 3시간이면 적당하다.

백운정에서 잠시 쉰 다음에 제 1환(1st ring)과 제 2환(2nd ring)을 편도로 건너질러가면 12시 정도가 된다. 여기부턴 다시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걸어가는 길은 2015년 7월 당시에 막혀있었다. 때문에 1시간 반 정도 기다려 시하이(서해) 케이블카를 타고 백운(baiyun)호텔에 도착하면 14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잠시 광명정을 다녀오자. 1~20분 정도면 왕복할 수 있다. 사람이 꽉 들어차면 좀 더 걸리기도 한다. 광명정을 본 뒤에는 하산을 시작할 차례이다. 나는 하산시에 걸어갈 예정이었으므로 14시 20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에는 2~3시간 정도면 적당하다.




이런 계단은 참 흔하다.

도중에 만나게 되는 협곡

서해대협곡의 풍경



열심히 걸어서 옥병루(yupinglou) 호텔에 도착하니 15시 정도였고, 이어서 계속 걸어내려가 자광사(mercy light temple)에 도착하니 16시 30분이었다. 여기서 이제 다시 셔틀버스(19위안)을 타고 탕커우 마을로 가야 한다. 탕커우 마을에서 툰시행 버스 막차가 17시 30분이기에 서둘러야 한다.




카메라에 배터리가 없어 많은 사진을 찍지 못해 설명이 좀 부실해 아쉽지만 포스트의 주 목적은 일정표를 정리하는 것이었으니 어느 정도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6시: 툰시 출발(관광버스)
7시: 탕커우 도착, 셔틀버스로 환승
8시: 윈구 케이블카 기점 도착, 케이블카 대기
9시 30분: 윈구 케이블카 하차, 등산 시작
9시 50분: 시신봉 도착
10시 30분: 사자봉 도착
11시: 백운정 도착
12시: 서해대협곡 제 2환 완주, 서해 케이블카 대기
14시: 백운호텔 도착, 광명정 구경
14시 20분: 하산 시작
15시: 옥병루 도착
16시 30분: 자광사 도착
17시: 탕커우 버스 정류장 도착
17시 30분: 툰시행 버스 탑승(17시 30분이 막차 시간이다)


지도까지는 미처 만들지 못해 괜찮은 지도 링크 몇 개를 첨부한다. 포인트 표시가 각각 한글, 한자, 영어로 되어있지만 여러 개를 서로 비교하면서 보면 코스 정리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지도1

지도2

지도3



툰시에서 첫차를 타고 출발해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모든 중요 포인트는 다 찍고 돌아보는 이른바 고속 산행 코스입니다. 평소에 산행을 즐겨하는 것도 아니고, 축구나 농구 같은 구기 종목조차 안 하는 보통 이하 체력의 젊은이이지만 패기 하나로 해냈으니 여러분들도 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7/24/2015

중국 배낭여행 총평 (샹하이, 쑤저우, 황샨, 시안, 뤄양)

11년만에 중국을 다시 다녀왔다. 코스는 샹하이-쑤저우-툰시-황샨-시안-뤄양이었다.

1. 난 그 동안 중국 한족과 한국인을 외모로 구별할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는데 완전히 오해였다. 딱봐도 한국인인데 알고보니 중국인인 경우는 수도 없었지만 딱봐도 중국인인데 한국인인 경우는 없었다. 달리 말하면 한국인은 중국인의 부분집합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부 중국 학자들이 한국인은 운좋게 독립을 유지한 중국의 소수민족일 뿐이라며 동북공정을 하는 것도 이해가 불가능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이 문제에 대해서 중국학생과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논리가 기가 막혔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한국을 침략한 중국은 오늘날의 중국과 다르다. 그 시기의 중국은 분열된 상태였기에 서로 싸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하나의 중화 뮨명을 지향한다. 따라서 한국, 베트남, 미얀마, 몽골 등은 중국에 흡수되어 다함께 밝은 미래를 도모하는 게 당연하다."

는 것이었다. 100년 전 일본의 동아시아공영론과 다를 바 없는 기가 막힌 논리가 아닌가! 중국이 그래서 티벳이랑 위구르를 점령해 자치구로 삼았구나 싶었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힘의 논리에 따를 뿐이다. 아마 한국이랑 베트남도 냉전 때문에 분단되지 않았다면 이미 중국의 소수민족 자치구가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장제스의 군대가 베트남에 주둔했었고, 마오의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왔었던 걸 생각하면 아예 불가능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

추가로, 중국이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주변국(한국,베트남,미얀마,필리핀,몽골,인도)와 영토 분쟁을 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다. 중국에선 공항은 물론이고 지하철역, 기차역, 버스터미널, 박물관, 역사유적에서마저 보안 검색을 실시하는 걸 보았을 때 소수민족이 저지르는 테러에 대한 공포가 엄청난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에는 외부 집단에 대한 적개심이 가장 효과적이기 마련이다.



시안 샨시 박물관의 보안 검색대. 자기 짐을 누군가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열정들이 대단하다.




2. 샹하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자기부상열차가 시속 430km를 찍더라. 중국은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예전에 이미 한국을 뛰어넘은 게 분명하다. 누가 아직도 샌드위치론을 주장하는가?



샹하이 공항철도. 무려 시속 430km이다. (Shanghai Maglev 430km/h)

3. 보행자들이 가방을 앞으로 매고 다니는 빈도가 각 도시마다 달랐다. 샹하이는 상당수가 그렇게 하고 다녔는데 툰시 같은 시골 도시에서는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각 도시별 빈도를 조사해본다면 각각의 사회 신뢰 수준을 수치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방을 앞으로 멘 사람의 사진은 못 찍었지만 이건 찍었다.
에어컨 바로 밑에 플라스틱 박스로 리모컨을 고정시켜놨다.
얼마나 도난이 많았으면?


4. 샹하이에서 유대 피난민 기념관들 갔었다. 역시 유대 자본의 힘은 어마어마하더라. 아마 그곳이 샹하이에서 가장 정성이 많이 들어간 박물관일거다. 심지어 무료 가이드투어까지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그 가이드처자는 "중국은 유대인들을 언제나 환대했답니다"라고 했는데, 에라 이 사람아, 타 민족이 피난 간 이국 땅에서 환대받은 적은 어느 시기에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어요.

유대 피난민 기념관 입구의 조각상


5. 유커가 한국에서 난리치고 간다고 모든 중국인이 나쁜 건 아니다. 30년 전에 니혼진이 파리의 호텔에서 팬티만 입고 돌아다녔다고 모든 일본인이 나빴던 건 아니고, 15년 전에 한국 깃발부대가 태산에 가서 김치찌개에 참이슬 마시고 고성방가했다고 모든 한국인이 나빴던 게 아니듯.
 일반적으로 소국과 대국이 인접해있으면 소국은 편견, 대국은 오만으로 상대를 대하기 마련이다. 이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인도와 네팔, 중국과 베트남이 그 대표적 예 아닐까?
             

6. 현지어를 배운 적이 없어도 얼마든지 혼자 배낭여행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이번에도 워뿌슈중궈런(나는 중국인이 아닙니다) 또샤우취엔(얼마에요) 샤이거,시소우젠짜이나(어이 쾌남, 화장실이 어디에요?) 이 정도만 썼다.


7. 그리고 필담으로도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초등학교 이후로 한자를 다 잊어버려 기억나는 건 약 300자에 불과하지만 그걸 손바닥에 써가며 중국인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저 멀리 500년 전 조선의 사신들도 명의 관리들과 필담으로 대화했다더라.


8. 중국이 한 자녀 정책을 시행한지 어언 30년, 왠만한 꼬마아이들은 전부 다 소왕자, 소공주처럼 위세를 떨친다. 아이 하나당 어른 여섯 명이 붙는 2대 독자들이시니 어련하실까. 이렇게 귀하게 자라신 꼬마님들이 과연 미래 중국 사회에서 중추가 되었을 경우 이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


9. 예전에 읽었던 한 역사책에서 로마 제국과 진 제국을 비교하기를, 똑같은 벽돌을 가지고 로마는 도로를 텄고 진은 벽(만리장성)을 쌓은 것이 두 문명의 진로를 갈랐다 했다. 소통이 원활해진 유럽은 크게 진보한 반면, 배타정책을 시행한 동아시아는 정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대에 와서는 아닌듯 하다. 일대일로까지 갈 것도 없이, 중국의 으뜸이라는 황샨(한국 발음 황산)에 올랐을 때 그 정도 산에 케이블카 노선이 세 개나 있는 걸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현대 중국인들의 길에 대한 집착은 가히 병적이다. 히말라야가 중국에 있었다면 지금쯤 케이블카 노선이 이백 개쯤 설치되어 스키장이 되었을 것이다.

황샨의 케이블카. (Huangshan Cableway)


10. 나는 어쨌든 그 케이블카를 한 번은 탔는데 두 번 탈 돈(편도 16000원)은 없어 계단을 따라 오르고 있었다. 혼자서 길도 모르고 한참 오르고 있었는데 인적이 드문 것이 느낌이 쌔했다. 마침 근처에 있던 한 중국인 아저씨에게 이 길이 맞냐고 물어보니 아니라는 게 아닌가. 낙심해 그 자리에 주저앉은 내게 아저씨가 생수 한 병을 건네주었다. 세상에, 저 생수도 산중에선 꽤나 비싼 가격일텐데. 애초에 그 돈도 아끼려고 산밑에서부터 물 몇리터를 들고 올라가던 내게 그건 엄청난 선물이었다. 샤이거, 쎼쎼.


11. 중국의 스케일이 정말 어마어마한게, 시안(옛 장안)의 성곽에 올라갔더니 전동차를 타고 한 바퀴 도는 투어가 있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성곽을 돌아보는데는 몇 시간이 걸린단다. 그런데 이마저도 옛 장안의 전성기에 비하면 7분의 1 규모로 축소된 것이라니..


시안 성벽 (Xian City Wall)

그리고 카트 (Xian City Wall Kart)

어마어마한 병마용의 규모 (Qin Terracota army. Bing Ma Yong)

여긴 쑤저우인데 역 앞의 광장이 이만치 크다. 저 동상은 정말로 거대하다. (Xuzhou station frontyard)

12. 중국이 진정 사회주의 공산국가인가?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공안차와 Jeep가 딱 마주친 상황을 목격했다. 지프의 운전자는 딱 봐도 "내가 이 동네의 최고 갑부다, 이 천놈들아!"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는 무서울 게 없다는 중국 정치권력의 집행자 공안. 기세만은 둘 다 만만치 않았는데, 1분 정도 기싸움을 하다가 공안이 후진을 하기 시작하더라. 누가 봐도 지프 운전자가 후진을 해야 할 골목길이었지만 중국은 미국보다 더한 천민 자본주의 국가일 뿐이라는 걸 느꼈다.

공안과 Jeep의 대치 장면


13. 상업의 역사를 거론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게 중국 상인이다. 화교를 포함한 중국 상인의 상술은 가히 세계 최고일 것이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이런 민족을 공산국으로 개조하려 했다니, 그 당시 토지불평등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최고의 가치를 돈에 두는 중국인들이 공산당의 대장정에 호응했다는 건 엄청난 사회 불만이 팽배했다는 뜻일 것이다. 오늘날의 정세도 심상치 않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요즘, 과연 한국식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안녕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







글 내용과는 관계 없는, 추가사진



시안 종루 야경. (Xian Zhong Lu nighttime)
시안 고루 야경 (Xian Gu lu nighttime)

세상에 이렇게 복잡한 한자는 처음 봤다. 뺭뺭면이란다. (Biang Biang Mien)
  
햇빝 가리기에 매우 유용해보인다. 중국 내륙 도시에서 많이 보이더라. (Umbrella Moped)

쑤저우 어딘가에 있는 사원의 호숫가 야경 1

쑤저우 어딘가에 있는 사원의 호숫가 야경 2

셋째 화장실이라...

도대체 뭘 쓰고 싶었던 걸까? 한국인 맛?

호스텔에서 만나 같이 놀았던 중국인, 멕시코인 친구들

3/04/2015

삶의 기본적 조건에 관하여

오늘의 대화 주제 중에 아프리카의 사파리가 있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길래 이 곳에 써본다.

돈 많은 유럽인, 동아시아인들이 아프리카에 놀러가 지프를 타고 사자와 기린, 영양을 보며 놀러다니는 소위 '진짜배기 사파리' 말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진짜배기 사파리로 부를 수 있는 일인가? 애초에 그 사파리들은 관광객용으로 개발되어 안전하기 짝이 없기에 사자를 보더라도 마음 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현지 사람들도 과연 그 여유와 낭만을 누릴 수 있을까? 그들에겐 사자의 위협이 현실적인 공포인데 말이다. 애초에 돈 많은 관광객들이 하듯이 DSLR과 산탄총을 들고 지프를 이용해 밀림을 누빌 수 없는 현지 사람들에겐 야생의 세계가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예전에 네팔의 찌뜨완 국립공원에서 현지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있다. 그 사람이 가이드를 해주기로 했기에 아침 해뜰무렵 조류 관찰을 갔었다. 가면서 코뿔소 얘기를 한 기억이 있다.

현지가이드 : 저기 저 농장 보여? 어젯밤에 코뿔소가 와서 헤집고 다닌 자국이야.

나 : 우와 진짜? 가서 구경하자!

현지가이드 : 가서 뭐하게?

나 : 코뿔소 발자국 사진이라도 찍게! 아 코뿔소를 직접 봤다면 참 좋았을 텐데 진짜 아쉽다...


이렇게 반응하는 나를 보고 가이드는 어이없어했다. 그 때는 그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코뿔소와 호랑이의 존재는 삶의 실제 위협이었다. 코뿔소가 와서 농작물을 망치고, 호랑이들은 가축을 잡아먹고.

그들은 야생동물과 맞닥뜨릴시 저항하기 위해 길다란 나무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고 다녔다.






나는 그 몽둥이를 보고 왜 그 때는 멋있다고만 생각했을까.













 결국 나는 그 국립공원의 어딘가에서 야생의 코뿔소를 실제 볼 수 있었다. 완전히 신난 나는 가이드에게 코뿔소 근처로 가보자고 졸랐지만 그는 내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코뿔소의 시력이 나쁘기에 망정이지, 그 때 나는 너무나 철이 없었다.

네팔의 로컬버스

불현듯 네팔 포카라의 로컬버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행비도 아끼고 현지 사람들을 더 만나고 싶어 로컬 버스를 자주 타고 다녔지만 유독 네팔의 로컬버스는 그 충격이 강렬했다.


운전기사와 차장이 따로 존재하는 그 버스.
따로 티켓이 존재하지 않아 차장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현금을 내는 그 버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네팔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차장이 요금을 속이는 경우는 없었지만 아닌 경우도 꽤 있다고 들었다.


버스가 승객을 얼마나 더 태우냐에 따라 기사와 차장의 수입이 결정되기에 정류장을 딱히 지키는 것도 아니다. 버스가 문을 열고 달리는 경우도 꽤 많은데, 이 때 차장은 문 밖에 매달려 길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호객행위를 한다.

"ㅇㅇ갑니다 ㅇㅇ! ㅇㅇ갑니다! 버스 지나가요!"



창문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얇은 플라스틱과 같은 형상이며 고정대가 부러지거나 한 구석이 깨져있어 항상 차가운 바깥바람이 새어든다. 따뜻한 낮에는 괜찮지만 추운 밤이 되면 그야말로 고역이다.


좌석은 또 어떠한가. 1석의 크기가 얼마나 비좁은지, 키 170cm에 몸무게 60kg인 내가 앉아도 다리를 잔뜩 붙이고 있어야 할 정도이다. 덩치 큰 북유럽인들은 아예 앉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들은 서있을 수도 없었다. 버스 천장이 너무나 낮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하기 때문.

바로 다음과 같이 말이다.



2/07/2015

네팔 여행 4부 - 카트만두, 박타푸르

 드디어 마지막 종착역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90일간 남아시아일주의 마지막 여행지가 될 곳이다. 카트만두에서 쓸 수 있는 시간은 총 이틀 반.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걸어다니기로 했다.



타멜의 새벽 모습. 방콕의 카오산로드 못지않은 여행자거리다.
  
더르바르 광장. 더르바르라고 불리는 광장은 카트만두 근교에 꽤 많이 있다.

조그만 제단

이 곳에는 항상 비둘기들이 떼지어 있는데 소녀들이 비둘기를 쫓으며 즐거워한다.

박타푸르 광장 내부

우리가 산에서 약수를 받았다면 이 사람들은 지하에서 약수를 받는다.

견과류 라씨. 한국의 씨앗호떡 정도의 위상이다.
견과류에는 대체 어떤 마법이 있는 걸까.






 자연에 관심이 많기에 국립 자연사박물관도 가보았다. 가보니 외국인은커녕 내국인도 없는 휑한 곳이라 관리인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자 좋아하면서 잘 대답해줬다. 네팔에서도 취직난은 꽤 큰 문제 같았다.

자연사박물관 1. 영구보존된 아기코끼리

자연사박물관 2

자연사박물관 3. 진짜 박제이다.




 국립 자연사박물관에서 나온 다음에는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어느 나라의 문화재 보존 수준을 보려면 국립박물관을 보라는 말이 있다. 네팔은 문화재 보존에 거의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국 불안정 때문일까?

영 불안해 보이는 안내판. 정문에 이게 달려있다.

국립박물관 1. 내부 역시 창문과 냉난방조절자이가 없다.
그나마 이건 유리통 안에 있지만,

국립박물관 2. 이건 그냥 밖에 있다.

국립박물관 3. 여러 불상들

각 나라의 전통 의상을 착요한 인형들을 모아놨는데, 일부 국가는 거의 모욕 수준이다.
예를 들면 왼편의 몽골...몽골인들이 보면 화내지 않을까..

한국 인형. 어떻게 이걸 구했는지 신기하다.

누가 보면 스페인에는 처키가 사는 줄 알 듯.






 이번 여행에서 다녔던 나라들 중 가장 초라했던 국립박물관을 나온 뒤에는 스와얌부나트 사원으로 향했다. 이 사원은 원숭이떼가 많기로 유명하다. 손에 먹을거리를 들고 다니면 안되는데, 원숭이들이 잽싸게 뺏어가기 때문이다. 뺏어가기만 하면 다행이고, 행여나 손톱으로 할퀴기라도 하면 광견병 주사를 바로 맞아야 한단다.




스와얌부나트 사원의 중심탑

그리고 원숭이떼

가족인가보다

포즈 좀 잡을 줄 아는 원숭이

사원 근처에서 파는 기념품 1

사원 근처에서 파는 기념품 2

사원 내부에 가지런히 모여있는 돌탑들

사원 한구석에서는 새끼 강아지들이 한데 모여 곤히 자고 있다.

사원에서 바라본 일몰 무렵





 다음날은 박타푸르로 향했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 근교의 도시인데, 예전에는 독립 왕국이었던 곳이다. 중세의 건물과 분위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관광지로 인기가 좋다. 편하게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난 역시 로컬버스를 타고 갔다.


로컬 버스. 대부분 대학생들인데 이 날은 시험일이라 버스 안에서도 공부에 열심이였다.




 카트만두에서 박타푸르까지는 버스로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박타푸르 1

박타푸르 2


박타푸르 3. 어딜 가나 많은 직물 가게.

박타푸르 4. 더르바르 광장

박타푸르 5. 역시나 더르바르 광장의 내부

박타푸르 6. 이런 돌탑도 있다.

박타푸르 7. 이 곳에 올라가 보았다.

박타푸르 8.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박타푸르 9. 각종 장식이 화려하다.

박타푸르 10. 단체로 관람하러 온 초등학생들.

박타푸르 11. 닭들이 광주리 안에 갇혀 있다.

박타푸르 12. 조각에 열심인 장인 청년.
  



 한참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 간식거리를 좀 사먹었다.


킹커드. 달디단 생크림 느낌이다.

버블티.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버블들이 들어있다.
타로 열매가 아닌 건 확실한데, 뭔지 알 수 없다.
이빨에 닿는 순간 터질정도로 약한 비누거품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나도 내가 여기 탄 게 신기하다.




 카트만두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이렇게 카트만두와 근교를 마지막으로 내 이번 여행은 끝이 났다.

 새롭게 느낀 점이 참 많은 여행이었다. 모든 속마음을 여기에 밝힐 수는 없고, 대신 이 정도(링크)면 적당하다고 본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절대로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